김수영의 마지막 숨결 도봉산서 '풀'을 읊고 수락산 자락 '귀천정'서 천상병을 마주하다

입력 2019-12-01 15:57   수정 2019-12-02 10:42

서울서 작품활동 한 문학인서울에는 한국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문학인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작가들의 삶과 문학 세계를 기리고자 그들이 살았던 터에 문학관과 산책로를 조성했다. 깊어가는 가을날, 감성으로 무장한 작가들이 사색하며 걸었던 길을 따라 문학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자유를 갈망했던 시인 김수영문학관

도봉구는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김수영이 작품 활동을 했던 곳이다. 2013년 11월 27일, 그의 생일에 맞춰 도봉구 방학동에 김수영문학관을 건립했다. 김수영은 1921년 종로구 관철동에서 태어났지만 문학관과 시비가 도봉구에 세워진 이유는 그가 마지막에 살던 집터가 이곳에 있고, 그의 유해가 도봉산 자락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문학관에서 시인의 삶의 궤적을 만날 수 있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문학관에는 6·25전쟁, 4·19혁명, 5·16군사정변 등 굴곡진 현대사의 한복판에서 자유에 눈 뜬 그가 온몸으로 저항하며 쓴 시와 산문 육필원고가 전시돼 있다. 절대 자유를 갈망하던 김수영 시인이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신, 원고를 쓰던 식탁과 즐겨 있던 서적들도 전시돼 있다. 1969년, 김수영 시인의 문학 세계를 기리기 위해 도봉동 김수영 시인 묘소에 시비를 세웠다. 시비는 나중에 도봉산 등산로 입구에 있는 도봉서원 앞으로 이전됐다. 시비에는 그의 마지막 작품 <풀>의 두 번째 연을 시인의 필체 그대로 새겨놓았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순수했던 영혼 천상병공원과 문학의 숲

‘귀천’의 시인 천상병은 일본 효고현에서 태어나 1945년 해방되자 경남 마산에 정착했다. 1949년 당시 마산중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시인 김춘수였다. 김춘수의 영향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천상병은 1949년 <공상>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서울대 상대에 입학하면서 서울에 터를 잡은 천상병은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 입구에 살면서 문학 활동을 펼쳤다. 순수했던 천상병 시인을 기리고자 수락산 노원골 입구 근처에 시인의 조각상과 ‘귀천정’이라 불리는 정자를 세워 ‘천상병공원’을 조성했다. 시비에는 그의 대표 시 <귀천>을 새겨놓았다. 공원에는 천상병이 썼던 안경, 찻잔, 집필원고 등 시인의 유품 203점을 수집해 타임캡슐을 묻어놓았다.

그의 탄생 200주년을 맞는 2130년 1월 29일에 개봉한다고 한다. 천상병공원과 이어진 수락산 디자인거리에는 왕꽃벚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세련된 간판이 걸린 맛집이 늘어서 있다. 매년 10월, 이 거리에서 ‘천상병문화축제’가 열린다.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계곡이 흐르는 숲길이 나온다. 등산객들로 붐비는 수락산 오솔길에 ‘아름다운 소풍 천상병 산길’이라는 문학의 숲길을 조성했다. 숲이 선물한 청량한 공기를 마시며 길을 오르면 시인의 아름다운 시어가 맑은 바람을 타고 와 가슴에 스민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수필 문학의 대가 피천득 산책로

서초구 반포동 피천득 산책로는 오랫동안 서초에서 작품 활동을 펼친 시인이자 수필가 피천득을 테마로 조성한 문학의 길이다. 자연과 동심을 소박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그린 피천득은 1930년 ‘서정소곡’으로 등단해 수필 문학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서정시집> <금아시문선>, 수필 <인연> <은전 한 닢> 등은 섬세하고 간결한 언어로 쓰여 큰 사랑을 받았다. 1980년부터 2007년까지 반포주공아파트에 살았던 피천득이 반포천 둑길을 즐겨 걸었다 해서 조성된 산책로는 지하철 고속터미널역 5번 출구와 바로 이어진다. 고속터미널역에서 이수교차로까지 1.7㎞에 이르는 피천득 산책로는 반포천을 따라 걷는 길이다.


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고 가을에는 나뭇잎이 붉게 타오르는 산책로에는 시인의 서정적인 문장이 길을 따라 새겨져 있다. 그의 작품 <인연>과 <이 순간>의 페이지가 펼쳐진 높이 2.2m의 대형 책 조형물 안에서 피천득 동상(아래 사진)이 걸터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다. <백날 애기> <너는 이제> <꽃씨와 도둑> <축복> <이 순간> 등 수려한 문장을 따라 이어진 둑길 벤치에 앉아 그의 시 한 편을 감상해본다. ‘달무리 지면, 이튿날 아침에 비 온다더니. 그 말이 맞아서 비가 왔네, 눈 오는 꿈을 꾸면 이듬해 봄에는 오신다더니, 그 말은 안 맞고 꽃이 피네.’

명암 엇갈린 우리 문단의 거두 이광수 별장터

종로구 홍지동에 있는 이광수 별장터는 춘원 이광수가 1934년부터 1939년까지 별장을 지어 머물던 곳이다. 당시 조선일보 부사장이었던 이광수는 세검정 일대의 풍경 좋은 곳에 한옥 별장을 지었다. 비 온 뒤의 흘러내리는 폭포가 장관이었던 세검정과 오간수대문이 놓인 홍지문, 흥선대원군의 별장 석파정이 근처에 모여 있는 동네 풍경은 조선시대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등장할 만큼 아름답다. 상명대를 오르는 옆 골목, 가파른 언덕 중턱에 있는 별장은 ㄷ자형의 개량 한옥으로 당시 유명했던 건축가가 지었다. 별장 <춘원헌>에서 이광수는 여러 작품을 발표하고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신라시대 화랑 이차돈이 불교를 포교하다 순교하는 과정을 담은 역사소설 <이차돈의 사>와 한 여자의 삶이 파멸로 끝나는 소설 <그 여자의 일생> 등을 썼다. 이광수가 별장을 짓고 살던 동네에 대한 애정은 소설 <육장기>에서도 드러난다.

‘날이나 밝은 아침이면 밥솥과 장작과 빨래 보퉁이와 빨래 삶을 양철통과를 사내가 걸머지고, 여편네는 잔뜩 한 임이고 코 흘리는 아이를 데리고 자하문으로 주렁주렁 넘어오는 것이 봄부터 가을에 걸쳐서 이 고장의 한 풍경이오’라며 자신이 살던 세검정 언덕 아래 계곡에서 빨래하던 사람들의 풍경을 정겹게 묘사하고 있다. 당시 이광수가 살던 한옥 건물은 사라지고 우물과 향나무, 감나무만 남아 있다. 지금 남아 있는 한옥은 1970년대에 새로 지은 집이다. 이광수가 살던 <춘원헌>은 1930년대 조선인 재력가와 문인들이 살던 도성 밖 별장의 정취가 담긴 장소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이광수는 일제강점기 친일행적으로 비판받고 있으나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발표하고 수많은 걸작을 남긴 한국 근대문학사의 선구자임은 부정할 수 없다.

글·사진=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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